모두들 반갑습니다.

                               <치파오>
     
중국 청나라 때에 형성된 중국 전통 의상입니다. 보통 원피스 형태의 의복형태를 일컫는 말입니다. 몸에 딱맞는 형태의 옷이며, 옆에 트임을 주어 여성미와 실용성을 강조합니다.

     중국 식당에 치파오를 입고 근무하는 여성을 흔히 보시죠? 치파오는 비싼 것 정말 엄청 비쌉니다. 나중에 중국에 여행갈 때 꼭 한 벌 사야죠.  치파오의 원류와 종류는 본문 끝부분을 참조하세요.

     아래는 중국 여자 배우들이 치파오를 입는 모습입니다. 과연 누가 더 이쁠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장쯔이!


사용자 삽입 이미지

림지령!



장만옥, 타임 머신에서 나온 옛 상하이 여인.



      온벽하, 이쁘고 사랑스러운 여인.


      등려군, 그 시대의 절대가인!



진호!



조아지!  품위가 있는 여인.



강진진!




종려제!



장량영!




이가흔!




진홍!




 리지(이연걸의 부인), 유가령




왕비!




이문! (CoCo Lee)


장람람!




이자!




도홍!



이능정!





수기!




이소연!




막문위!




웅홍!



양천화!




주해매!




진혜림!




원영의!




공리!




천심!




진수!




하싸이비!




주신!



China dress 치파오 이즈클럽 화보 촬영현장









1. 치파오(旗袍)의 원류
사용자 삽입 이미지


치파오의 기원은 멀리 춘추전국시기의 심의(深衣)로 거슬러올라간다. 심의는 춘추전국시대부터 한대(漢代)까지 사람들에게 널리 사랑을 받던 옷이다. 후세의 파오(袍: 중국식의 긴옷)는 아마도 이 심의와 어느 정도 연원관계가 있는 듯 하다. 사실 심의는 파오와는 다소 다르다. 심의는 투피스 형식으로 상의와 치마를 하나로 연결한 듯한 효과를 나타내고, 파오는 원피스 형식으로 상의와 치마의 구분이 전혀 없다. 후에 파오는 점진적으로 안정된 복식 스타일로 정착되어 발전하였다.

파오는 한대부터 관복으로 사용되었다. 처음에는 X자형 깃에 품이 넓고, 길이가 발등까지 닿으며, 소매가 넓으면서 끝이 좁고, 팔꿈치 부분이 원호 형태였다.

파오의 스타일은 시대별로 다르게 나타났지만 품이 넓고 길이가 긴 것이 가장 전형적인 것이었으며, 대체로 지식인이나 지배계층에서 즐겨 입었다.

소수민족이나 유목민족 지구에서 유행한 파오는 일반적으로 말타기나 활쏘기 등 격렬한 활동을 하기에 편리하도록 몸에 꽉 끼는 것이었다. 이러한 파오는 대체로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고 소매가 좁으며 품이 몸에 맞았다. 역사적으로 한족들도 이렇게 몸에 꽉 끼는 스타일의 파오를 여러 차례 수용한 적이 있었다. 조(趙)의 무령왕(武靈王)이 추진한 호복(胡服: 북방 유목민족 복장) 차림의 말타기와 활쏘기가 비교적 전형적인 사례이다.

당대(唐代)에도 호복은 일시에 유행하였는데, 개원(開元: 713~741) 천보(天寶: 742~755) 연간에 호복은 호장(胡粧: 유목민족 치장), 호기(胡騎: 유목민족의 말타기), 호악(胡樂: 유목민족의 음악)과 함께 당시 사람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요(遼) 금(金) 원(元)과 청(淸) 왕조 등 소수민족 정권의 통치시기에 몸에 꽉 끼는 파오는 복식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청대는 통치시기가 가장 길면서도 안정되었기 때문에 파오는 전형적인 복식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청(淸) 순치(順治) 원년(1644)에 세조(世祖)가 중원으로 쳐들어와 북경에 도읍을 정하고 전중국 통일하였다. 그후 정권이 점차 안정되면서 변발의 강요와 함께 의복제도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때부터 상의에 치마를 입던 투피스 형식의 복장은 한족 여인들이 집안에 있을 때만 입었고, 공식적인 장소에서는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파오를 입어야만 했다. 그 결과 파오의 종류도, '차오파오'(朝袍), '롱파오'(龍袍: 용포, 황제가 입던 용무늬를 수놓은 예복), '망파오'(蟒袍: 망포, 대신들이 입던 이무기 무늬를 수놓은 예복), '창푸파오'(常服袍: 평상복) 등으로 많이 늘어났다.

의미상에서 보면 치파오(旗袍)는 만주족들이(남녀 불문) 입던 창파오(長袍)이지만, 팔기(八旗)의 여성들이 평상시에 입던 창파오만이 후세의 치파오와 혈연관계를 가지고 있다.(그림1) 예복으로 사용한 차오파오와 망파오 등은 통상적으로 치파오의 범주에 들지 않는다.

청왕조의 통치자들은 만주어와 말타기, 활쏘기 등을 중시하면서, 자신들의 풍습과 복식을 유지하려 애썼다. 한편으로는 만주족의 의상으로 한족을 동화시키면서, 만주족과 몽고족 여성들이 한족의 패션을 모방하는 것을 엄금했다. 순치(順治: 1644~1661), 가경(嘉慶: 1796~1820) 연간에 여러 차례 반포한 금령(禁令) 속에서 만주족 여인들이 한족 패션을 모방한 기풍이 성행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만주족과 한족 여인들의 복식 스타일의 점진적인 융합으로 양자의 차이가 점점 줄어들면서, 마침내 치파오의 전국적인 유행을 예고하게 되었다.

청대 후기에 만주족 여인들이 입었던 창파오(長袍)는 품이 넓고, 선이 곧고 강하며, 길이가 복사뼈까지 내려왔다. "위앤 바오링(元寶領)"은 아주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옷깃의 높이가 볼을 덮어 귓볼까지 이르렀으며(그림2, 3), 파오의 표면에는 형형색색의 무늬를 수놓았고, 옷깃, 소매, 옷섶, 옷자락에는 모두 여러겹의 넓은 단이 있다. 함풍(咸豊: 1851~1861) 동치(同治: 1862~1874) 연간에는 이러한 단을 넣는 것이 크게 유행하여 원래의 옷감과 거의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였으며, 만주족 여인들의 파오에 치장한 다양한 장식은 최고 수준에 도달하였다.

이 때 청왕조는 국내외적으로 난국을 맞이하여 국력이 극도로 쇠약해져 있었다. 서양 열강들은 강력한 포화를 앞세워 청왕조의 굳게 닫힌 문을 열었다. 국가의 위기를 구원하기 위해 청나라 조정의 양무파(洋務派)들은 "중체서용(中體西用)"의 구국 방침을 정하였다.

많은 유학생들을 외국으로 파견하여 서양 문물을 배우도록 하고, 군대도 신식 군대로 개편하였다. 중국의 학생과 군인들 사이에서는 서양식 학생 체육복, 모자와 서양식 군복, 모자, 양복을 수입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서양 의상의 수입은 미의 가치 척도 평가에도 영향을 미쳐 일반사회의 복식 관념을 변화시켰다.

그후 치파오는 중국과 서양이 융화된 새로운 스타일로 발전하였으니, 치파오가 서양의 영향을 받아 개량된 것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의 성공으로 중국의 마지막 봉건왕조가 붕괴되면서, 서양식 의상이 중국에 자유롭게 보급될 수 있었으며, 아울러 전통적인 예교와 교화 관념이 희석되고 복제(服制)의 엄격한 등급도 사라졌다. 이로써 의상에 있어서 평민화 국제화 현상이 출현하게 된 것은 자연적인 추세였으며, 치파오도 오랜 전통의 속박의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만주족 정권의 패망으로 당시에 치파오를 입는 사람들은 아주 적었다. 서양식과 중국식이 혼용되면서(그림4) 옛날 만주족 여인들의 전통적인 창파오는 사라지고 새로운 스타일의 치파오가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에 패션유행의 중심지는 소주(蘇州)와 양주(揚州)에서 이미 상해(上海)로 옮겨져 있었다. 당시 상해는 항구의 개방으로 중국과 서양이 공존하고 각지의 사람들이 모여사는 번화한 외국인 거주지인 동시에 여성해방 운동의 중심지였다.

선교사, 상인, 혁명당원들은 다투어 여학교를 창설하면서 여권운동의 전성기를 맞이하였고, 해방을 추구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복식과 치장에 있어서 구습을 타파하였다.

이리하여 패션 스타일은 청왕조 때의 화려하고 복잡한 양식에서 간결함을 지향하면서, 색상도 우아함을 추구하고 여성의 자연미 표현을 중시하였다.

치파오는 처음에는 마갑(馬甲)의 형식으로 출현하였다. 마갑은 길이가 발등까지 내려오는데 짧은 솜저고리 위에 걸쳐 입었다. 그후 마갑을 소매가 있는 양식으로 개량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신식 치파오의 추형이다.(그림5) 이러한 신식 치파오를 유행시킨 이들은 상해 지역의 여학생들이었다고 한다. 당시 여학생들은 지식여성의 대표로써 사회의 이상형이었다. 그녀들은 문명의 상징이자 유행의 선도자였기 때문에 사회 유명인사나 화류계 여인 등은 모두 여학생 차림을 하고 다녔다. 1930~40년대는 치파오 전성기로 그것의 기본적인 윤곽은 이미 성숙되었다.
신해혁명 이후 북벌전쟁 시기에 유행한 신식 치파오는 만주족 여인들의 창파오와 달랐다. 1930년대 후기에 출현한 개량 치파오는 구성상에서 서양식 재단 방법을 흡수하여 품을 더욱 몸에 맞게 만들었다.

치파오는 청대 만주족 여인들의 창파오에서 탄생되어 나왔지만, 옛날 스타일을 훨씬 벗어나서 중국과 서양의 복식 특징을 융합한 근대 중국 여인의 표준 의상이 되었다.


2. 현대의 치파오(旗袍)
사용자 삽입 이미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패션 유행의 선도 그룹은 평민이었으며 그들은 소박하고 실용적인 것을 추구하였다. 의상에 있어서 사람들의 미적 추구는 거의 대부분 혁명사업에 대한 열기로 변화되었다. 치파오가 대표하는 유유자적한 숙녀형상은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존재할 공간을 상실함으로써 치파오는 쇠퇴기를 맞이하였다. 이 시기의 의상은 단순함과 소박함을 중시하였는데, 남성복은 중산복(中山裝), 학생복(學生裝), 춘추삼(春秋衫), 작업복(工作服) 스타일의 자켓, 군용 외투(軍大衣), 파커가 위주였고, 여성복은 원피스 스타일의 리앤이췬(連衣裙)과 레닌복(列寧裝)이 유행하였다. 많은 여성들은 앞에서 말한 남성복을 착용하기도 하였다. 색상은 녹색, 남색, 검정색, 회색 등 단조로운 색상이 대부분이었다.

1956년에 이르러 이러한 상황은 다소 호전되었다. 그 이유는 구소련의 고위급 인사가 중국을 방문했을 때 그는 중국인의 의상이 사회주의 대국의 현실에 부합하지 않다고 지적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에 1956년부터 중국정부에서는 국민들에게 무늬가 있는 의상을 입도록 권유하였던 것이다.

1956년 상해시 부녀연합회와 미술가협회가 공동으로 패션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이때 아름다운 의상을 입는다는 것은 다시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졌으며, 이로써 치파오도 다시 새로운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1950년대의 치파오는 구시대적 이미지를 완전히 벗어났다. 복잡하고 자질구레한 장식을 없애고, "실용성, 경제성, 심미성"의 추구를 의상과 나염을 포함한 공예미술계에 보편적으로 요구하였다. 치파오의 디자인은 간결하면서도 수수하고, 허리 품은 40년대보다 넓어졌으며, 자수와 테두리 등의 장식을 아주 적게 사용하고, 색상은 우아하면서도 조화로움을 추구하였다.

치파오가 1950년대에 잠시 찬란한 순간을 맞이하였다고 한다면, 그후 20년 동안 1960~70년대에는 한 순간 찬란했던 그 빛마저 상실해 버리고 말았다. 과거 우아하고 매력적이던 치파오의 자태는 연기처럼 사라지고 자취를 감추었다. 문화대혁명 10년 동안 일부 대담한 사람들은 치파오를 가지고는 있었지만, 그것을 조용히 박스 안에 모셔놓을 수밖에 없었다.

1966년부터 1976년까지 계속된 문화대혁명 기간에 전통문화는 말살되고 치파오도 수난을 만났다. 문화대혁명은 치파오가 중국대륙에서 철저하게 종적을 감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일찍이 19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에 정치에 민감은 사람들은 대폭풍의 회오리를 예견하고 구문화적 색채가 짙은 치파오를 몰래 숨겨두고 예기치 못할 풍운을 피하려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과연 폭풍의 회오리가 중국 전역에 불어닥치면서, 치파오는 "봉건주의의 잔재" "부르조아적 정서"라는 이유로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무수한 치파오가 잘려나가고 치파오를 입은 여성들이 거리에서 비판을 받았다. 당시 치파오로 비판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여성간부와 고위급 인사 부인들도 있었는데, 그 중에는 유소기(劉少奇)의 부인 왕광미(王光美)도 포함되어 있었다.

손문(孫文)의 부인 송경령(宋慶齡)도 평생 동안 치파오를 좋아하였다. 그녀는 손문의 아내라는 특수한 신분 때문에 동란 중에서도 비교적 자유롭게 치파오를 입을 수 있었다. 송경령의 사진을 통해서 우리는 몇십년에 걸친 치파오의 변천 과정을 엿볼 수 있다.(위의 송경령을 클릭하면 그녀가 입었던 치파오를 볼 수 있음)

그러나 이때의 치파오는 1940년대의 스타일을 고수하고 있었으며, "레닌복" 등 1960~70년대의 유행복과 함께 입었던 것 외에 치파오 자체에는 외형상 어떠한 변화도 없었다. 이 시기에는 회색, 남색, 검정색, 녹색의 제복이 유행복이었다.

치파오가 중국대륙에서 냉대를 받았던 20년 동안 해외에서는 여전히 중시를 받았다. 해외 화교사회에서는 문화대혁명의 동란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복식 문화는 전통적인 색채를 비교적 잘 보존할 수 있었다. 치파오는 과거에도 입었고 지금도 입고 있으며, 디자인은 참신해지고 더욱 섬세해졌다

1953년부터 1961년까지 치파오는 지상에서 20cm 정도 떨어진 것을 표준으로 삼고 디자인의 곡선화를 지향하여, 끝자락이 화병만한 크기로 작은 것이 사람들의 더욱 많은 사랑을 받았다.

치파오는 국제패션대회에서 여러차례 수상하여 세계 유명 디자이너들로부터 찬사를 받았으며, 그러한 치파오의 독특한 매력은 그들의 디자인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치파오의 명성이 해외에서 드높아짐에 따라 많은 외국 배우들이 중국으로 와서 치파오를 주문해 갔다. 해외 화교들도 대부분 대륙의 치파오를 정통으로 삼았다.

이때 중국대륙의 여성들은 치파오를 입지는 않았지만, 중국대륙(특히 상해)의 패션디자이너들은 여전히 해외 화교들을 위해 치파오를 제작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치파오는 대부분 예복으로 간주되어 홍콩과 대만 여성들 사이에 치파오를 평상복으로 입는 일이 점점 줄어들었다.

10년간 동란의 문화대혁명 시기를 겪은 후 중국의 패션계는 다시 활기를 되찾게 되었다. 1980년대에는 치파오가 다시 유행할 것이라는 예측도 있었다. 사회적 변화로 사람들의 미적 감성이 더 이상 구속 받지 않게 됨으로써 치파오는 생존과 발전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치대로라면 당시 큰 주목을 받았던 치파오가 당연히 다시 사람들의 곁으로 돌아왔어야 했다. 그러나 예상을 뒤엎고 치파오는 더 이상 유행하지 않았고, 소수의 사람들만 그것을 즐겨 입을 뿐이었다.

치파오의 전성기는 멀리 사라졌다. 30년이란 오랜 세월 동안 냉대를 받았던 치파오는 1980년대 개혁 개방의 조류 속에서도 여전히 과거의 명성을 되찾지는 못하였다.

1950년대에 치파오는 혁명과 검소를 상징하는 레닌복과 인민복(군대의 평상복)에 그 자리를 물려주어야만 했다. 이로부터 치파오는 낙화유수처럼 쇠퇴해져, 30년 후에는 치파오에 정통한 기술자와 전문가들도 점점 줄어들었다. 치파오 제작에 정통한 것으로 유명한 상해에도 치파오 등 중국 전통의복 제작 회사로는 용봉공사(龍鳳公司)만 남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치파오는 유행에 필요한 생산기술의 기초를 다시 상실해버렸다. 게다가 치파오 제작에 필요한 직금단(織錦緞) 고향단(古香緞)과 같은 전통 옷감은 1980~90년대의 시대적 풍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되었으며, 기업가도 그후로는 새로운 옷감을 더 이상 열심히 찾지 않았다. 이러한 것들이 치파오가 유행되지 못한 원인이다.

사람들의 생활방식 변화도 치파오의 유행에 영향을 미쳤다. 1980~90년대에 접어들어 여성들의 직업 분야가 확대되고 활동력이 증대됨으로써 치파오의 여성스럽고 우아한 자태는 활동력을 많이 필요로 하는 현대여성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다.

그러나 1980~90년대는 직업적 의미가 강한 "유니폼 치파오"가 출현하였다. 광고와 판매 등을 목적으로 홍보도우미나 연회장 호텔 식당 등에 근무하는 여성들이 치파오를 입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치파오는 천편일률적으로 생사를 모방한 화학섬유를 많이 사용하여, 색상이 화려하고 옷자락에 터놓은 부위가 매우 높으며, 제작 기법이 조잡하다. 이것은 실제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던 치파오의 아름다운 형상을 훼손시켰다. 사람들은 자신의 신분을 구별하기 위하여 함부로 치파오를 입지 못하고 있다.

비록 여러 가지 원인으로 치파오가 일반인들에게 널리 유행되지는 못했지만,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치파오의 위치는 확실히 다시 상승하고 있다. 결혼식, 연회, 해외방문, TV프로그램 등과 같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치파오는 정식 예복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패션화 된 치파오나 치파오의 멋을 살린 패션은 이 시기 패션계의 주요 관심사였다. 패션잡지와 패션쇼에 출품한 작품들 속에는 언제나 치파오가 등장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유명한 디자이너들도 나타나게 되었다. 유명한 디지이너로는 이염평(李艶萍), 요홍(姚紅) 등이 있는데, 특히 요홍은 1983년 <<시장(時裝)>> 잡지사와 일본 <<장원(裝苑)>> 잡지사에서 공동으로 주최한 제1회 "중국패션문화상" 디자인 경연대회에서 치파오를 출품하여 일등의 영예를 안기도 하였다.

1980~90년대에 여성들의 이상형은 다시 변화되었다. 크고 날씬하며 어깨가 나란하고 히프가 작은 몸매가 사람들이 동경하는 형이었다. 1930~40년대를 반영한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현대 치파오의 "수정판"이 출현하곤 하는데, 이는 디자이너들이 1980~90년대의 심미관으로 지난 세월 속에 투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치파오가 비록 광범위하게 유행되지는 못하였지만 그것은 결국 다시 중국인 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중국의 세계화 상징으로서 그것은 전통문화가 사라져가고 있는 현실 속에서 대단히 소중한 모습으로 재등장하였다. 한 세기 동안 중국인의 전통 의상으로 명맥을 유지해 온 치파오는 변화와 발전의 과정을 거쳤지만 여전히 중국적 정서를 짙게 보존해 왔으니, 그것의 강건한 생명력은 다른 어떤 전통의상과도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앞으로도 치파오는 중국인들에게 계속적으로 전승될 것이며, 나아가서 새로운 시기에 다시 한번 찬란한 빛을 발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